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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다는 말)




<돌아간다는 말>

-이재무 (시인· 서울디지털대 교수)-

저명인사의 묘비명은 곧잘 화젯거리를 낳는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내 언젠가 이런 꼴 날 줄 알았지”,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화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 

중광 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 천상병 시인은 “소풍”이라 했다. 그런데 나는 죽음에 대한 이러저러한 표현 중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돌아가셨다’ 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돌아갔다’는 말은 ‘왔다’ 라는 말을 전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돌아가다’ 라는 말은 온 곳으로 다시 ‘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언젠가는 태어나기 이전의 원적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지구는 우리가 잠시 머무르다 가는 여행지일 뿐이다. 머물렀다 가는 길에 생의 감탕을 남기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다.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의 시 ‘귀천’ 부분). 

일체의 장식적 수사와 기교를 생략한 채 ‘이슬’ ‘노을빛’ 등의 감각어로 빚어낸 소멸의 이미지로 미련과 집착을 버린 무욕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낸 이 시편은 읽을 때마다 뒤죽박죽 엉켜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왔던 것은 언젠가는 가게 마련이다. 누구도 벗어날 길 없는 자연의 순리요 법칙이다. 시절도 만남도 젊음도 사랑도 와서는 북새를 이루다가 소리소문 없이 떠나가는 것, 이것은 누구나 살면서 겪고 치러내야 할 숙명의 과제요 자명한 이치다. 

젊은 날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내게로 오는 것에 주목하며 살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이상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내게서 떠나가는 것에 더 눈길을 보내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른 새벽에 깨어나면 누워 있는 상태로 한참을, 우두망찰 벽이나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그럴 때면 아득히 먼 과거의 파편들이 계통 없이 수시로 출몰해 머리를 어지럽히곤 한다. 

그러나 이런 혼돈이 나는 싫지가 않다. 현재에 무의도적으로 개입하는 과거의 조각들로 인해 내 삶은 매 순간 다르게 구성된다. 

요컨대 출몰하는 과거로 인해 나는 새롭게 구성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빌려 말한다면 개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면 하나: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동무들과 어울려 구슬치기, 딱지 따먹기를 해서 모은 그 귀한 보물들은 어디로 다 증발해 버렸나? 우리가 평생 살면서 애써 모은 것들도 먼먼 후생에는 그날의 딱지나 구슬처럼 자취가 없을 것이다. 

장면 둘: 소풍날 시오리 굽은 길을 걸어 산사(山寺)의 큰 나무 아래 웅기중기 모여 앉아 김밥 먹고 노래자랑과 보물찾기를 하다가 해 저물면 정리 정돈한 뒤 오던 길을 되돌아갔듯, 

지금은 생의 놀이가 한창이지만 도도한 삶의 취흥도 이내 곧 시들어 마침내 삶이 종착에 이르게 되는 날에는 사느라 어지럽힌 자리 치우고 정(淨)한 몸으로 귀천해야 하리. 

장면 셋: 겨울의 하오 또래들과 땅뺏기놀이에 열중하다가 다저녁에 밥 지어 놓은 엄니의 호명 소리에 사금파리로 야금야금 차지한 땅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신발로 박박 문질러 지우고는 집으로 달려갔듯이 

하늘로부터 부름 받는 날엔 아등바등 움켜온 재물 따위 내팽개치고 왔던 때의 홀몸으로 돌아간다면 그처럼 거룩한 일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내가 내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가 나로 돌아가는 길은 사느라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이 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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