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한국정부 무관심 속 개발회사에 팔려
원로들 “역사 보존해 기념관으로 만들어야”
흥사단 초기 총본부 역할을 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 재개발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흥사단은 일제강점기 광복과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던 구국단체다. 구 본부 건물(3421 S Catalina St.)은 LA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USC 인근의 대한인국민회관과 불과 3블럭 떨어진 곳에 소재한 2층 주택으로 초기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건국이념 제공은 물론,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 후원과 일꾼 양성을 통해 민족 독립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으로 한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대한인국민회가 집행기구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흥사단은 싱크탱크와 교육기관이었다. 국민회의 기관지격인 신한민보를 흥사단이 경영해 국민교육과 계몽에 힘을 쏟았다.
원로 흥사단원인 차만재 박사는 “1층에 사무실과 회의실이 있었고 많게는 30여 명이 모여 월례회, 전국대회를 열기도 했다”면서 “2층엔 베드룸이 있어서 유학생이나 방문객이 며칠씩 신세를 지기도 했던 해외 한인사회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고 밝혔다.
1913년에 설립된 흥사단은 원래 공립협회와 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단체로 첫 본부는 LA다운타운의 현LADWP 건물 자리에 있었고 1935년부터는 USC 인근에 카탈리나 건물을 신축해 45년간 사용했다.
1948년 흥사단 본진이 해방된 한국으로 환국했지만 이미 미주에 뿌리 내린 한인들이 미주위원부를 구성해 이 건물을 계속 사용하며 북미, 중남미, 하와이, 유럽 등 해외 본부 역할을 맡았다. 세월이 흘러 1969년 제 역할을 다한 대한인국민회가 전격 해산하면서 흥사단 미주위원부는 홀로 서기를 할 수 밖에 없었고 1978년 샌타바버러의 강진으로 인해 건물이 일부 파손돼 본부 건물을 팔았다.
언론인 민병용씨는 “취재를 위해 자주 들렀다. 1979년 12월 26일 이사한 것도 기억한다”며 “사무실 집기는 1994년 한국 독립기념관에 모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차만재 박사는 “국민회도 없고 이민도 막혀 연로한 흥사단원들이 재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며 “원래는 당시 새롭게 형성되는 올림픽·웨스턴으로 사무실을 옮기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인사회의 중심이 USC 인근에서 올림픽으로 옮기면서 흥사단이 따라가야 한다는 절박함과 건물 인근에 흑인이 대거 몰리면서 집값이 폭락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차 박사는 “흥사단이 건물을 되사기에는 너무 오래된 점이 있어 아쉽다”며 “하지만 2년 전 매물로 나왔을 때의 시세가 흥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과 너무 차이가 나서 구입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정용조 미주 단소건축 및 관리위원장은 “한인타운에 단소(본부)를 마련하려던 중 매각 소식을 들었다”며 “시세차가 너무 커서 내부 논의 중에 개발업자에게 거액(185만 달러)에 팔렸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흥사단을 제치고 건물을 구입한 트립얼링크(tripalink.com)사는 기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어 임대사업을 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위원장은 “(카탈리나 건물을) 재구입해서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기초한 장소로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국민회는 해산했지만 40년만인 2000년대 초에 기념재단을 세워 본부건물을 기념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 한인들의 중심지였던 복원된 대한인국민회관과 흥사단 본부 건물 등의 제퍼슨 일대를 한인 이민 역사 문화유적지로 묶으면 한인 2세들의 정체성 함양은 물론, 한인 이민 후손들의 뿌리교육, 대한민국의 자존감 복원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영조 위원장은 “2년 전 흥사단 본부와 한국정부에도 건의했지만 좋은 소식을 못들었다”며 “굳이 흥사단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앞장서서 카탈리나 건물을 기념관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